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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시론] 신세계의 용단과 남은 과제 [중앙일보 칼럼 2006-09-11] 관리자 2007/02/08 8034
신세계 정재은 명예회장이 법대로 거액의 증여세를 납부하고 자녀에게 경영권을 승계하기로 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데도, 세간의 관심이 적지 않다. 최근 일부 국가지도자들의 탈세와 연금미납 사건들을 생각해 보면 신선한 충격이기도 하다. 특히, 신세계발 충격은 그동안 우리 사회 전반에 확산된 반(反)기업 정서를 불식할 수 있는 호재이기에 더욱 고무적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의 투명성이 높아졌다며 주가도 올랐다.

1990년대 중반을 전후해 우리 사회에서는 부의 세습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급속도로 팽배해 왔다. 특히, 일부 재벌들이 편법적인 절세 방법을 동원해 소액의 증여세만 내고 경영권을 2세에게 승계시킨 사실이 이를 더욱 가속화시켰다. 일부 시민단체들은 법망을 피한 경영권 승계 자체를 무효화시키기 위해 소송을 제기하는 등 부의 세습 자체를 우리 사회 최고의 악으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그 대가 또한 만만치 않다. 부자들의 투자 기피, 경기 침체, 그리고 성장동력의 고갈이 그것이다. 이를 두고 정치권은 물론, 사회 각계 각층에 걸쳐 그 책임 소재를 놓고 논란이 많다. 이런 상황에서 신세계가 거액의 증여세 납부 계획을 밝힘으로써 부의 세습에 대한 논란을 잠재울 수 있는 전기가 마련됐다.

증여세나 상속세는 모두 불로소득에 대한 중과세라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그 정당성을 인정받고 있다. 나라마다 세율과 과세 방법이 다를 뿐이다. 그중에서도 우리나라는 증여.상속세율이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 신세계의 경우처럼 주식을 증여하는 경우 최고 세율 50%에 가산세율까지 적용돼 상속.증여 재산의 최대 65%를 세금으로 내야 한다. 이론적으로는 신세계 회장 부부가 현금과 주식으로 2조원을 증여하는 경우, 그 전액을 세금으로 내야 하는 사태도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자진신고를 하면 10%의 감면 혜택을 주지만 우리나라의 상속 및 증여세율이 세계 최고 수준인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러한 징벌적인 중과세는 기업들로 하여금 법망을 피하는 절세의 길을 택하도록 강요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그 결과가 반기업 정서를 심화시키고, 심지어 우리 경제의 발목을 잡는 상황을 빚어냈다고도 할 수 있다. 악법도 법인 이상 지켜야 하는 게 맞다. 그렇다고 그 법으로 인해 국가 경제가 큰 타격을 입는다면 문제다. 헌법상 기본원칙인 과잉금지의 원칙에 반하는 위헌의 소지를 안고 있는 것이므로 재고할 필요가 있다.

신세계의 증여세 자진 납부가 우리 경제.사회 전반에 걸쳐 새로운 변화의 가능성을 열었다고 해서 앞으로 제2의 신세계가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증여나 상속과 동시에 경영권 상실을 초래할 수 있는 현행 세제를 보다 현실적으로 바꾸지 않고는 자진 납부를 통한 정당한 부의 세습 풍토가 정착되기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재 세계 각국은 상속세 및 증여세를 낮추는 경향이다. 1972년 상속세를 폐지한 캐나다를 필두로 호주.뉴질랜드.이탈리아.포르투갈.스웨덴.싱가포르 등이 상속세를 폐지했다. 미국도 2011년 상속세를 폐지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싱가포르는 전 세계 부자들의 돈을 유치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상속세를 없애버렸다고 한다. 상속세를 폐지하지 않은 나라들도 상속세와 증여세에 차등을 두어 탄력적으로 운용하고 있으며, 대체로 그 세율도 40%를 넘지 않고 있다. 외국인이 대거 지분 참여를 하는 상황에서 현행 세법을 고수할 경우 국내 기업이 경영권을 위협받을 수 있다는 주장 역시 엄살만은 아닌 듯하다.

7000억원을 증여하면서 3500억원의 세금을 떳떳하게 내겠다는 신세계 총수 일가의 결정은 일단 바람직한 변화다. 그러나 한 번의 사례에 마냥 찬사를 보낼 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 정당한 납세 풍토가 확고히 자리 잡을 수 있도록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할 때다.


전삼현 숭실대 교수·법학